이름:친일진상규명 ( 남 )
2004/8/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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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조선일보, 우리는 너희를 알고 있다(1)  

친일파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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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조선일보, 우리는 너희를 알고 있다(1)   - 친일진상규명 ┼
│ 친일반민족지 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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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선일보, 우리는 너희를 알고 있다(1)   - 알센루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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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 민족지 조선일보의 친일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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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로부터 '강제 폐간' 당했다는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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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제 폐간의 진실은 사뭇 다르다. 1940년 8월 폐간된 사실과 관련해 "조선일보 80년사" 발간사에서 현 방상훈 사장은 "민족지들이 친일을 했다면 일제가 왜 폐간을 했겠느냐"고 따졌다.
│ │ 하지만 우리가 폐간이라는 말에서 느끼는 것처럼 일제가 어느 날  갑자기 총칼을 앞세우고 신문사 문을 폐쇄한 것이 아니다. 사실 일제로서는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민족지'를 굳이 폐간할 이유까지는 없었다.
│ │ 다만 전쟁 중이던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물자절약 차원에서 일본 국내에서도 지방마다 한 신문사로 통폐합한 것뿐이다. 실제로 조선일보는 폐간사에서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성업을 성취하는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야분려한 것은 사회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 │ 조선일보는 총독부와 협상 끝에 폐간 보상금으로 총독부와 매일신보로부터 각각 80만원과 20만원을 받았다. (당시 가미가제 전투기 한 대의 값이 10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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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석춘, "부자신문 가난한 독자"  인용,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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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는 '범인'이고, 일왕은 '천황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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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가 상해 임시정부 김구 선생의 밀명을 받고 일왕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진 사건은 일왕에 대한 한인 최초의 쾌거였다. 이와 관련, 의거 이틀 뒤인 1932년 1월 10일자 조선일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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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황폐하 황행 도중 / 노부에 돌연 폭탄 투척 / 8일 오전 동경 경시청전에서 / 어료차 별무이상 / 범인은 경성출생 이봉창 / 현장에서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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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는 제목으로 보도하면서 일왕은 '천황폐하'로 이봉창은 '범인'으로 보도하였다.
│ │ 그러나 블라디보스톡 방송과 중국의 신문 등 이웃나라 언론에서는 - 애국적 기개 높이 사며 - 이 사건을 매우 긍정적으로 다뤄줬다는 점이다.
│ │ 또한 국경지역에서 일제의 관공서를 습격하거나 일본군을 토벌한 무장항일세력에 대해서는 '비적'이라는 경멸스런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밖에도 윤봉길의거 김상옥의거 나석주의거 등을 한결같이 '범인' 운운하며 '불경사건'으로 규정하고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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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운현,"조선일보와 사주 방응모의 친일행각" [왜 조선일보인가?] 인용,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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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민족의 상징인 '백의' 폐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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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의를 폐지하자. 꼴사나웁고 불경제이오, 외인의 조소조차 받고 있는 백의를 폐지하자. ...백의인. 백의민족의 말은 명예이나 자랑삼아서 내세울 것은 못된다. '백의'의 좋지 못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니 경제 되지 안는 것이 한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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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흔히 우리민족을 '백의민족' 이라고 하듯이 '백의'는 우리 민족에게 의복 이상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 사설은 '단순히 우리민족이 즐겨 입는 정도'인데다  '비경제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학교나, 교회, 사회단체 등에서 백의착용 폐지운동을 벌여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운동은 결과적으로 조선민족의 민족혼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의도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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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운현,"조선일보와 사주 방응모의 친일행각" [왜 조선일보인가?] 인용,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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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군을 '아군' '황군'으로 보도한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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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일전쟁 발발(1937년) 5일 뒤인 7월 12일 총독부 당국은 경성 내 주요 신문사의 대표를 초청, '보도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로부터 불과 1주일도 안돼 조선일보는 일본군을 '아군' '황군'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후 1면과 사회면 머릿기사는 거의 전쟁기사로 채워졌다.
│ │ 개전 1개월 뒤인 8월 12일자에는 국방헌금 모금을 위한 사고(社告)를 게재하기도 했는데, 이른바 일제의 침략전쟁에 우리민족의 고혈을 짜서 군수물자를 보내자는 운동이었다. 당시 중국은 조선인 항일세력의 근거지이자 임시정부를 보호해준 우방이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조선일보가 조선인 청년들에게 전쟁터로 나가 일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선동까지 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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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운현,"조선일보와 사주 방응모의 친일행각" [왜 조선일보인가?] 인용,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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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민족 말살정책 적극 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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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일제의 '황민화 정책'은 1940년 2월 11일 시행된 '창씨개명'을 완성편으로 마무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는 '내선일체'라는 미명 하에 조선민족 말살정책으로 신사참배, 궁성요배, 국어(일본어) 상용, 일장기 게양, 기미가요 봉창 등을 추진하였는데, 이 모두는 일본 왕실 숭배 내지는 일본인화를 골자로 한 것들이다.
│ │ 조선일보가 일본 편에서 이와 같은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는 점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특히 우리 민족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바로 창씨개명이었는데, 설진창 같은 이가 창씨개명을 하고는 물에 빠져 목숨을 끊을 때, 그리고 수많은 조선 민중이 자신의 성을 일제식으로 바꿔야 된다는 현실에 치욕과 분노의 피를 토하고 있을 때 조선일보는 과연 어디서 무슨 작태를 벌이고 있었을까. "씨(氏)는 어떻게 정할까"라는 글을 연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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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운현,"조선일보와 사주 방응모의 친일행각" [왜 조선일보인가?] 인용,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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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일보 폐간 후 '조광'(월간조선의 전신) 통해 친일 열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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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일보가 폐간 된 1940년 8월 이후 방응모의 친일은 본격화되었다. 그 매개가 바로 자매지 '조광'이었다. 심지어 "징병제 실시 감사합니다"(1943년 8월호) 라는 제하의 글까지 실을 만큼 그의 친일은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숱한 물자와 인력이 전쟁터로 강제 차출돼 생활과 인심이 극도로 피폐해진 조선민중들의 현실을 대변하는 글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 권두언 이외에 방응모가 '조광'에 직접 쓴 친일논설로는 42년 2월호에 쓴 '타도 동양의 원구자'라는 글이 있다. 여기서 방응모는 일본을 가리켜 평화의 사도로 묘사한다. 아울러 일본의 대동아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조선민중은 물자를 절약하고, 저축을 더욱 강화해야 된다는 말도 빼놓지 않고 있다.
│ │ 한편 44년 8월호에서 '조광'은 "국어(일본어)를 상용합시다"라는 권두언을 통해 대만의 국어(일본어) 해독자는 전체 인구의 6할에 달하는데, 왜 조선민중은 이보다 훨씬 뒤떨어지냐며 야단치듯 훈계하고 있다.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선일보측은 방응모를 가리켜 "암흑기의 민족에게 언론의 횃불을 밝혀 민족의 길을 비춘 선구자"로 칭송하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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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운현,"조선일보와 사주 방응모의 친일행각" [왜 조선일보인가?] 인용,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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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합방은 조선의 행복 위한 조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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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은 1940년 7월호 자매지 조광의 권두언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일본제국과 천황에게 - 성은 속에 만복적 희열을 느끼며" 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돌아올 수 없는 그 뭔가를 건너버린 것이다. 특히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은 일제의 조선통치 30년을 맞이해 쓴 글에서 절정을 이룬다. 마침내 조선일보는 한일합방을 조선의 행복이라 하였다. 일제의 30년 조선통치로 '문화조선'이 건설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글 원문을 인용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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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한양국은 양국의 행복과 동양 영원의 평화를 위하여 양국 병합의 조약을 체결... 데라우찌 총독은 조선통치의 대본을 정하여 창업의 토대를 쌓은 위대한 공적을 남겼거니와....30년 동안 7대에 이르는 총독들은 그 시대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특색있는 정책을 실시하여 그 결과는 오늘날과 같은 문화조선 건설을결실....
│ │ 2천3백 반도 민중은 한결같이 내선일체를 실천해 황국신민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사려 깊은 시정(한일합방) 30주년을 맞이하여 각각 자기의 시국인식을 반성하고 시국의 장래를 투명하게 관찰하여 일층 각오를 굳게 하고 또 일단의 노력을 더하여 그 영예를 선양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자매지 [조광] 194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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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지환, "한일합방은 조선의 행복 위한 조약" 월간 말 98년 12월호 인용,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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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파문제 국사교과서개편, 조선일보 강력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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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부는 94년 3월에 국사교과서 개편작업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 구성된 '국사교과서 개편위원회'는 '일제말기 황국신민화에 앞장선 사회 지도층의 친일파로의 전락' 등을 다뤄야 한다는 사안을 마련했다. 그런데 조선일보가 그해 3월 20일 대형 기획기사를 통해 국사교과서 개편위원회를 빨갱이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 │ 왜곡된 한국 현대사를 바로 잡으려 했던 시도는 결국 친일 언론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세력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끝내 무산되었다. 스스로를 민족지라고 자랑했던 조선일보라면,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그 일을 후원까지 했어야 되었건만, 왜 그들은 역으로 강하게 반발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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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지환, "족벌신문과 밤의 대통령" [왜 조선일보인가?] 인용,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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