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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비론의 함정을 경계하라 '조선일보 공정성 1위' 기사를 보고  


..  양비론의 함정을 경계하라
'조선일보 공정성 1위' 기사를 보고

최규민 기자 radioheaven99@hanmail.net

"...하지만, 이 같은 언론 보도의 공정성 시비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갤럽이 지난 4일 신문이미지를 평가하는 전화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보면 우리 국민들이 '가장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신문은 역시 조선일보였다. 이 조사에서 '기사가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가장 공정하게 보도하는 신문'을 묻는 질문에 우리 국민의 약 5명 중 1명(18.4%)이 꼽은 '조선일보'가 1위를 차지했다. 그 뒤는 A일보(12%), B일보(10.4%), C신문(7.2%) 등이었고 '모름 무응답'은 42.4%였다. 특히, 평소에 신문을 구독하고 있는 독자층 중에서도 조선일보가 가장 공정하다는 평가는 19.2%로 비독자층(17.4%)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1위를 차지했다..."(조선일보 9월 10일자 '독자와의 대화'면)

이 기사를 읽고 몇 가지 생각을 했다. 안티조선운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조선일보>의 해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은데도 <조선일보>가 여론조사에서 당당히 '공정한 신문 1위'를 차지하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북한'이나 '공산주의'라면 전후사정을 불문하고 '빨갱이'로 몰아붙이고, '김대중'이란 말만 나오면 무슨 일이든 눈에 쌍심지를 켜는 사람들 눈에는 <조선일보>가 가장 공정한 신문으로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우리 주변에 많다는 사실도 경험상 알고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공정성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보기에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사람들일까?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이 설문에서 '조선일보'를 꼽은 사람 중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 합리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면 왜 합리적인 판단력을 갖춘 이들이 <조선일보>를 가장 공정한 신문으로 믿게끔 됐을까. 나는 이들 중 대부분이 '양비론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이 독자를 현혹하고 공정성을 가장한 채 교묘하게 편파적으로 보도하는 방법으로 거론되는 것은 양비론뿐만은 아니다. 불공정한 기사의 취사선택·기사의 배치·편집·어휘의 사용 등도 양비론 못지 않게 소리소문 없이 독자를 호도하기 쉽다.

양비론이 특히 위험한 것은, 단순히 사실을 전달하는 글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독자를 설득하는 글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 양비론에 대해서 일반론적인 관점에서 접근해보기로 하자(구체적인 분석은 다른 분들이 많이 하고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런 분석은 이미 '조선일보는 나쁘다'식의 선입관 위에서 이뤄진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므로).

양비론이란 무엇인가. 사전에조차 올라 있지 않은 이 단어를 말 그대로 풀이해보자면, '제 삼자가, 대립하는 당사자 양쪽을 모두 비판하는 행위'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양비론은 그 자체로는 나쁘다 그르다 할 바가 못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속담처럼, 현실세계에서 다툼과 대립이 벌어질 경우, 어느 한 쪽이 100% 잘못되고 다른 한 쪽은 100% 무고한 경우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도 다툼을 평가하는 제3자가 어느 한쪽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옹호한다면 이는 객관성이 결여된 불공정한 평가가 될 것임은 자명하다. 따라서 양비론은 객관성을 중시하는 관찰자나 평가자라면 어쩌면 반드시 거쳐야할 판단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과정'으로서의 양비론과 '결론'으로서의 양비론은 엄연히 구별되어야만 한다. 양 당사자가 하나씩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잘못의 경중에 대한 가치판단이 반드시 뒤따라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치판단이 결여돼 있는 최종평가는 형식적으로는 공정해보일지 모르나 실질적으로는 불공정하다. 가치판단의 과정이 생략된 양비론적 결론은, 처음부터 어느 한 편만 옹호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위험하고 악질적이다.

'가장 알아채기 힘든 거짓말은 진실과 섞여 있는 거짓말이다'라는 격언처럼, 후자의 경우는 그 편파성을 쉽게 알아챌 수 있지만, 전자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며, 수용자들을 호도할 가능성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대립되는 사안에 대해서 양편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경청한 뒤, 양방의 잘잘못을 따져 어느 한쪽을 비판하는 것은 불공정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본질적인 잘못 하나와 지엽적인 잘못 하나를 대비시켜놓고 "그러니 너희는 똑같은 놈들이다"는 식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불공정하다.

가치판단의 기준에 대해서 딱 부러지게 '이거 이거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개인적인 가치관의 차이가 존재하니까. 어떤 이들은 '반공'이 최우선의 기준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아무튼 '빨갱이'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는 쪽이면 무조건 잘못이다라는 식의 결론이 가능할지도.

그런 몇몇 극단적인 기준을 제외한다면, 개인차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기준이란 이런 것이 되지 않을까. 즉 일반적인 정의의 관념, 인권과 약자의 보호, 평화, 뭐 그런 것들.

과정으로서의 양비론과 결론으로서의 양비론이 뒤범벅되면서 나타나는 현실적 폐해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첫째, 가치판단을 생략한 기계적 양비론의 적용은 객관성을 교묘하게 가장한 편파에 지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수용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평가자의 객관성을 선험적으로 신뢰하는 수용자들을 오도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른 쪽을 옹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양비론의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이른바 '물타기' 수법이 된다. 사건의 쟁점을 흐리고, 한 쪽으로 집중되어야 할 비난과 비판이 분산됨으로써,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혼동되고, 결과적으로 가해자의 편을 드는 셈이 된다.

둘째, 현실에서 양비론은 한국의 보수언론이 정치권을 비판하면서 자주 써먹는 수법인데, 양비론의 남발은 결과적으로 정치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는다.

예컨대 "여야가 또 다시 정쟁을 벌이고 있다. 민생은 뒷전이다. 덕분에 무고한 국민만 죽어난다"는 식의 정치해설 혹은 사설은 여야가 무엇 때문에 다툼을 벌이고 있으며 누가 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에는 소홀하다. 이런 기사가 반복되다보면, 그 대립이 정당하고 불가피한 종류라 할지라도 독자는 "이 녀석들 또..."하는 식의 혐오감만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

셋째, 양비론은 대안제시에 취약하다.

가치판단을 통한 어느 일방의 책임소재의 규명은 결과적으로 가해자의 반성과 대가를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반성과 대가(혹은 징벌)를 통해서 비슷한 대립과 다툼이 반복되지 않도록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양비론적 평가는 양쪽이 똑같이 혹은 엇비슷하게 잘못했으니 양편의 과실을 상계해 버리자는 결론으로 흘러가기 마련이고, 결국 같은 대립의 반복을 방지하는 효과는 미미할 수밖에 없다.

우리 언론이 양비론을 구사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강준만 교수는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자사의 이념적 성향을 명확히 드러내는 언론은 독자들에게 폭넓게 환영받을 수 없다. 즉 시장지배력이 떨어진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언론은 특정 정파에 유리하게 보도하고픈 유혹을 느낀다. 그래서 써먹는 것이 양비론이다. 자사와 대립되는 정파는 뚜렷하게 비판하고, 자사가 옹호하는 정파는 양비론적으로 두리뭉실하게 비판한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겐 양쪽을 다 꾸짖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언론이라는 인상을 주려한다는 것이다.

양비론적 사고는 대중에게도 적잖은 악영향을 미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치에 대한 필요 이상의 혐오감을 갖게 되는 것말고도, 일상에서 벌어지는 불가피하고 바람직한 대립과 토의마저 봉쇄하는 경향을 낳게 돼,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할 여지도 있다.

독자들은 마땅히 형식적인 양비론을 경계해야 한다. '과정'으로서의 양비론과 '결론'으로서의 양비론을 구별하면서 언론을 독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치판단 과정을 생략한 (혹은 의도적으로 배제한) '기계적인' 양비론이라면 언론의 의도를 의심하고 불공정성을 비판해야 옳다.

편파성이 뚜렷한데도 공정하다고 우기는 언론, 남을 비판하는 데는 열심이면서도 자기비판에는 소홀하기 짝이 없는 언론 - 언론의 이런 나쁜 버릇을 고쳐놓는 것은, 결국 독자들의 비판적 독해를 통한 끊임없는 견제와 감시밖에는 없다. 그것이 독자 자신의 정신건강을 지키고, 한국 언론을 정도로 이끄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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