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강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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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사람’이 아니면 신문을 끊을 수 없다  

독한 사람’이 아니면 신문을 끊을 수 없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그간 구독하던 A라는 신문을 끊고 B라는 신문을 구독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사람은 몹시 겸연쩍어하며 내게 미안하다는 말까지 했다. 아니 왜 나에게 미안하다는 걸까? 아마도 그는 내가 평소 주장하는 ‘신문 소비자운동’에 공감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운동이란 게 별 게 아니다. 신문을 공산품처럼 대하지 말고 신문의 논조와 내용을 잘 살펴 가급적 자신의 이념과 성향과 취향에 맞는 신문을 골라서 구독해야만 한국 언론이 잘 되고 한국 사회가 잘 된다는, 아주 소박한 내용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그 소박한 일을 실천하기는 매우 어렵다. 앞서 거론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나는 그러한 실패 사례를 많이 알고 있다. 당사자들이 귀찮다고 공개를 원치 않아서 그렇지 내 마음 같아선 한바탕 큰 ‘사건’을 만들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그런데 신문 끊기가 왜 그렇게 어렵다는 건가? 일부 신문들의 이른바 ‘진드기 작전’ 때문이다. 더 이상 신문을 넣지 말라고 해도 말을 듣질 않는다.(1단계) 화를 내면 몇 개월 공짜로 넣어줄 테니 봐 달라고 사정한다.(2단계) 그래도 화를 내면 다른 전문지를 공짜로 넣어 줄 테니까 봐 달라고 사정한다.(3단계) 그래도 화를 내면 꽤 값이 나가는 경품을 주겠댄다.(4단계) 그래도 화를 내면 인간적인 호소로 돌입한다. 같은 동네 사람끼리 이럴 수 있느냐는 것이다.(5단계) 어떤 사람은 1단계에서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2단계에서 무너진다. 5단계까지 통과해 신문을 끊은 사람은 졸지에 ‘독한 사람’이 된다.

‘독한 사람’이 되지 않고선 신문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없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물론 나의 5단계설을 일반화하는 데엔 다소의 무리가 있을 것이나, 신문 끊기가 쉽지 않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례를 들어볼까. {한겨레 21} 2000년 1월 6일자 <김규항·김어준의 쾌도난담>에서 작가 황석영 씨가 밝힌 이야기 좀 들어보자. 황석영 씨에게 무한한 감사와 더불어 존경을 보내면서, 그리고 인용하는 김에 ‘강준만을 위한 변명’도 끼워 넣으면서.

‘김치냉장고’까지 동원하는 {조선일보}

김규항: 많은 사람들이 강준만씨에 대해 말은 옳지만 방법에 문제가 많다는 식으로 말하곤 합니다.

황석영: 우리나라 풍토가 모난 정이 돌 맞는다는 이기주의가 있어. 그래서 바른말을 먼저 안 하려고 해. 눈치만 보고 ……. 바른 말을 했던 놈한텐 “니 말이 맞다” 어쩌구 하면서 다른 쪽하고도 합리적으로 지내려고 해. 그런 자기기만이 있어요. 이건 정말 없어져야 해.
김어준: 강준만에 대한 냉소나 비판도 그런 차원의 것이고.
황석영: {조선일보}를 언론개혁이란 큰 틀에서 정리하지 못하면 개혁은 끝나는 거요. 다음 정권도 마찬가지고.
김어준: {조선일보} 보십니까?
황석영: 난 본 적이 없어. 지난 10년 동안. (웃음) 근데 일화가 있다고. 일산에서 살 땐데. 이사 오기 두달전인가 조선 지국에서 온 거야. 김치냉장고를 들고 와서, 신문을 보면 준다는 거야. 김치 냉장고 시중가격이 10만원이 넘는데, 게다가 3개월 지나서부터 구독료를 받는다는 거야. 난 두달 있으면 이사갈 예정이었거든. (웃음) 그래서 뭐 넣으라고 했지.
김어준: 이거 오프더 레코드 아닙니까?
황석영: 이거 해도 돼. 재미있는 얘기니까. 그래서 신문을 넣은 거야. 그럼 아침마다 다른 신문하고 함께 올 거 아냐. 그러면 바로 {조선일보}만 싹 옆 복도계단에 치우는 거야. 청소하는 아줌마가 가져가게. 만날 그렇게 했지. 그러다 이사할 때가 됐는데 …… 근데 신문지국하고 관리실하고 연결이 돼 있어. 이사하는 날 득달같이 {조선일보} 지국에서 왔어. 얼마나 가슴이 뜨끔하고 멋쩍겠어. “아니 글쎄 예상도 안 했는데 이사가게 됐네요” 그랬지. 이사가는 주소가 어떻게 되냐는 거야. 거기도 넣어주겠대. 끔찍하잖아. 그래서 “거기는 벽지라 신문이 안 온다” 그랬지. 그랬더니 그 친구가 막 고민하더니 김치냉장고 절반값만 주시면 이걸로 끝내겠다는 거야. 그래서 얼른 줬어. 근데 아, 굉장히 찝찝하더라고. 김수영이 생각나대. 왜 나는 작은 일에만 핏대내고 그 소시민적인 ……. 차라리 김치독을 먹질 말든지. (웃음) 아 정말 창피하더라고. 그러니까 사람 사는 게 이런 거야. {조선일보}가 없어져야 하는 신문이라면서도 김치냉장고는 먹으려고 하고 …….
김규항: 그쪽에서 선생님 몰라봤죠?(웃음)
황석영: 몰랐지.
김규항: 알았다면 민족작가 체면이.(웃음)
황석영: 근데 내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출신이잖아. (웃음) 한참 날리던 시절에도 {조선일보}로부터 청탁을 받은 적이 없어. 찍힌 거지. 조선투위 싸울 때도 만날 거기 가 살았거든. 야지 놓고 …….

불공정거래도 사회 구조의 문제인가?

나에 대해 좋게 이야기해줬다고 황석영 씨에게 감사와 존경을 보내는 게 아니다. 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를 해주시고, 그걸 ‘오프 더 레코드’로 하지 않은 그 분의 깊은 뜻에 대해 절로 머리가 수그려지고 감읍하게 되는 것이다. 거의 모든 작가들이,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자신을 신춘문예로 등단시켜 준 신문을 자신의 ‘자궁’으로 간주하면서 그 신문에 대해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충성을 보내는 우리네 현실에 비추어 황석영 씨의 행동은 얼마나 위대한가!

황석영 씨도 말씀하셨다시피, 김치냉장고를 들이밀면 당해낼 사람이 거의 없다. 나의 {조선일보} 비판에 아무리 동의한다 해도 김치냉장고 앞에서 무너지면 무슨 수로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가 가능하겠는가. 이게 참 미치고 환장할 일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한다. 이건 신문 보급소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보급소 사람들은 구조적인 불공정거래의 희생자들이다. 이건 한국 사회의 양심인 척 행세하는 본사 최고 경영자 차원의 체계적인 마케팅(`?`) 전략에 따른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들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것임은 틀림없다.

또 하나 유념해야 할 것은 발행부수가 많다고 큰소리치는 신문일수록 그런 불공정거래 행위를 더욱 공격적으로 한다는 점이다. 몇 년 전에 신문구독 유치를 둘러싸고 어느 신문 보급소에서 발생한 살인사건도 당시 발행부수 1, 2위를 다투던 신문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런 불공정거래 행위는 덩치가 큰 대기업이 경쟁 관계에 놓여 있는 중소기업을 고사(枯死)시키는 고전적인 수법과 너무 흡사하다. 내가 알고 있는 사례들에 의하면, A라는 유력 신문을 끊기가 가장 어렵다.

그런데 일부 지식인들은 특정 신문의 발행부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신문의 논조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 구조의 문제라는 것이다. 예컨대, {문화과학』의 ‘편집인’인 심광현 씨는 {문화과학} 1999년 여름호에 쓴, 나의 {문화과학} 비판에 대한 반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운동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며, 그가 제안한 방법만이 유일한 실천방안인 것도 아니다. 조선일보의 위력은 조선일보 자체의 유능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극우적 이데올로기의 오랜 헤게모니(물론 오랜 정경유착)에서 기인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일보가 이 극우적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기반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넓은 기반은 조선일보를 보는 독자 대중이다. 설령 조선일보를 강제로 무력화시킨다 해도 조선일보를 보아왔던 독자 대중을 강제로 무력화시킬 수는 없다. 조선일보의 독자 대중을 변화시키려면 보다 다각적인 실천들, 특히 조선일보의 독자를 진보적인 신문의 독자로 변화시켜낼 수 있는 포지티브한 노력도 필요하다. 이런 식의 투쟁은 조급하게 발을 구른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시민단체 지도자들의 비굴함

이 주장에 대한 본격적인 장문의 비판은 단행본 {인물과 사상 14}에 실릴 것이다. 여기서 한마디만 미리 해두자면, 제발 유통 차원에서 저질러지는 {조선일보}의 극악스러움을 알고서 그런 소릴 하라는 것이다. 누가 하루아침에 된다고 그랬나? 누가 조급하게 발을 굴렀나? 명색이 좌파로서 {조선일보}를 상종하지 말라는 주문이 그렇게 여겨진단 말인가? 그리고 ‘포지티브한 노력’도 필요하다며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화과학}에게 그게 있을 리 만무하다. 그저 {조선일보}를 상대하더라도 이해해달라는 어설픈 항변일 뿐이다.

지식인들이 그 모양이니 정치인들은 어떻겠는가. 정치인들은 유력 신문의 논조에 따라 춤을 춘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착각이요 오류인가. 더욱 비극적인 건 감옥 갈 각오까지 밝히면서 정치개혁을 해야겠다는 시민운동 단체의 지도자들까지도 그런 오류와 착각에 빠져 유력 신문에 대해 매우 비굴한 자세를 취한다는 데에 있다. 그들이 기껏 하는 일이란 게 제발 좀 공정하게 보도해달라고 호소하고 읍소하는 것뿐이다.

일개 신문에 대해 당당한 소비자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정치개혁을 하겠다는 것인지 의아하긴 하지만 그들이 어리석은 건 아니다. 그들은 총선 이후 각자 자기 단체로 돌아가 언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걸 미리 염두에 두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너무 심한 생각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월간조선} 2000년 3월호에 박원순 총선연대 집행위원장과 서경석 공선협 집행위원장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걸 보고서 내 의심이 맞을 거라고 생각한다. 서경석 씨야 원래 그런 분이라 치더라도 박원순 씨는 {조선일보}의 흠집내기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던 인물이 아닌가. 내 장담하지만, 그들이 계속 {조선일보}를 그런 식으로 대하면 그들의 운동은 반드시 실패하게 돼 있다. {조선일보}에 대해 그렇게 비굴한 자세를 보이면서 무슨 정치개혁을 말하는가?

02) 734-9336으로 신고합시다

최근 한국 영화의 맹활약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이 영화 유통의 개선에 크게 힘입은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문제는 유통이다. 한국의 신문유통구조와 관행을 공정하게 바로잡지 못하면 한국 사회의 여론은 늘 왜곡될 수밖에 없다.

한국신문협회의 개정 규약에 따르면 경품 사용, 강제 투입 등 기존 규약상의 위반행위 외에 구독을 조건으로 2개월을 초과하여 무가지를 제공할 경우, 매 위반 건당 해당 지국과 본사에 각각 18개월분의 구독료에 해당하는 위약금을 부과하고 신고자에게는 사례금 20만 원을 지급토록 돼 있다. 나는 위약금 액수를 10배로 올리는 동시에 신고자 사례금도 2백만 원으로 10배 올릴 것을 제안한다. 사례금 재원이 없어서 그렇게 못하겠다면 이 경우 정부가 보조금을 대줘도 좋을 것이다. 위반 신고 전화는 (02) 734-9336, 팩스는 (02) 737-4672이다. {한겨레}를 포함한 ‘빅3’ 이외의 신문들이 한국신문협회에 강력히 요구하여 주기 바란다.

시민들의 신고를 환영한다는 TV 공익광고도 해야 한다. 공정거래위원회도 좋고 국정홍보처도 좋다. 그 누가 광고의 주체가 되든 과거의 사이비기자 신고 광고만큼은 해야 한다. 이건 한국의 언로(言路)가 독과점 체제로 전락하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제대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빅3’ 신문들의 시장점유율이 심화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언론재단 선임연구위원 허행량 박사는 {미디어오늘} 2000년 2월 17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론시장의 경우 ‘빅3의 점유율’이 70∼90%에 이른다는 이른바 ‘빅 3 원칙’도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광고주가 대부분 빅3에 몰려 이들의 시장점유율은 60% 대이다. 신문사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지만 빅3의 점유율은 높아지고 있다. 광고단가인상률이 동일한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수년 이내에 시장 점유율이 70%에 육박할 전망이다. 빅 보스(big boss) 모델은 세계의 잘 나가는 언론사는 모두 리더쉽이 강한 보스형 언론인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최근 들어 약세를 보이고 있는 언론사들이 우연히도 주인이 없는 회사라는 것은 우리의 언론산업이 빅보스 모델이나, 빅3 모델의 영역, 즉 시장경제의 영역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허 박사가 유통 차원에서 저질러지는 불공정거래 행위를 문제삼지 않고 그걸 마치 자연스러운 시장경제 원리에 따른 것인 것처럼 오해의 소지가 있게끔 말한 것은 유감이나, 하여튼 문제가 그 정도로 심각하다.

한국 사회가 현 상황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개혁은 정치개혁이 아니다. 아니 그게 가능하지도 않다. 세상 일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정치가 민의(民意)에 따라 움직일 수 있게끔 공정하고 투명한 언로(言路)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이며, 이를 위한 첫 번째 과업은 바로 신문유통의 공정거래를 확보하는 것이다. 시민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가 박탈된 상황에서 무슨 그 이상의 권리와 자유에 대해 말한단 말인가? 제발 우리 국민도 신문 선택의 자유 좀 마음껏 누려보자.

‘빅 3’ 이외의 신문들은 총궐기하라

앞서 {한겨레} 이야기를 한 김에 여기서 보론으로 유시민 씨의 명 논문 <조선일보에 ‘제 몫’을 찾아주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조선일보를 아십니까?}(개마고원, 1999)에 실린 이 글은 대단히 고급스럽거니와 한국 언론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꿰뚫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직 그 글을 읽지 못한 분들은 뒤늦게나마 꼭 {조선일보를 아십니까?}를 사서 보시기 바란다. 이 글에 나오는, {한겨레}와 관련된 대목을 잠시 인용해보자.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운동」의 기수 강준만 교수는 {한겨레}의 잦은 배달 사고와 부실한 ‘애프터 서비스’에 대해 한탄하면서 이제는 포기상태라고까지 하는데, 이건 {한겨레} 직원들의 서비스 정신 결여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신규진입자가 처할 수밖에 없는 불리한 경쟁조건의 산물로 보는 것이 옳다.”

나는 이 진단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동시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과학적 분석의 차원에선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대안 모색을 위한 실천의 차원에선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 이야기를 마저 들으시면 무슨 말인지 아시게 될 거다.

유시민 씨는 신문 유통 차원의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공동배달 시스템 구축을 제안했다. 나는 그 제안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나도 몇 년 전부터 그 필요성을 줄기차게 역설해 왔다. 그런데 그걸 역설하면서도 무언가 무력하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었다. 그게 현실적으로 ‘고양이 목에 방울 매달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그건 정부가 독한 마음을 먹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난관이 워낙 많기 때문에 정부 주도가 아니고서는 실천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 정부가 그런 일을 할까? 이것만 알아두면 된다. {조선일보}는 그걸 절대 원치 않으며 정부는 이미 충분하게 {조선일보}에 대해 비굴하게 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공동배달 시스템 구축은 지금으로선 기대하기 어렵게 돼 있다. 그래서 그만두자는 게 아니라 투쟁적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놓고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앞서 신문 유통의 공정거래 실현을 위해 {한겨레}를 포함한 ‘빅3’ 이외의 신문들이 한국신문협회에 강력히 요구하여 줄 것을 촉구한 바 있다. 그런데 과연 {한겨레}가 그 문제를 어느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할까? 이게 바로 {한겨레}의 문제라는 거다.

{한겨레}의 잦은 배달 사고와 부실한 ‘애프터 서비스’는 {한겨레} 직원들의 서비스 정신 결여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신규진입자가 처할 수밖에 없는 불리한 경쟁조건의 산물이라는 걸 내가 왜 모르겠는가? 문제는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이거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있느냐, 이 말이다.

성질 급한 독자들이 답답해 할 것 같아 곧장 결론을 말씀드리겠다. {한겨레}의 문제는 직원들의 서비스 정신 결여에 있는 게 아니라 최고경영진과 간부들에게 ‘유통 마인드’가 아예 없다는 데에 있다. 나는 {한겨레} 판매국 사람들로부터 ‘답답하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경영자들이 모두 다 지사형 언론인 출신들이라 유통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거나 조금 생각이 깨인 사람이라도 그건 구조의 문제라며 아예 포기해버린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 모두 한국 신문시장에서 “신규진입자가 처할 수밖에 없는 불리한 경쟁조건의 산물”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는데, 그걸 숙명으로 알고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어떻게 해서든 그 조건을 바꾸기 위해 발버둥칠 것이냐 하는 건 ‘마인드’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조의 문제도 실천의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 마인드의 문제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도무지 신문 선택의 자유가 없는 현 상황에 대해 왜 나 같은 사람이 가장 열을 내야 한단 말인가? 정작 똥줄 타야 할 이해 당사자들은 먼 산 바라보며 딴 짓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이르노니, {한겨레}를 포함한 ‘빅 3’ 이외의 신문들이여 총궐기하라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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