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숙번
2003/3/26(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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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김정일 애비가 김좌진장군 암살하다...  

항일무장투쟁의 선구자 김좌진 장군
Article No. 111  Posted by 서정범, on 99/06/06,18:04:26  
1889(고종 26)~1929 독립운동가, 장군, 호는 백야(白冶)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은 1905년 홍성에서 호명학교를 설립하고 15년 광복 사건으로 3년간 옥살이를 했으며 청년학우회 회원,한성일보 이사로 있다가 3.1운동때 만주로 건너가 북로 군정서를 조직,총사령이 되었다. 1920년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청산리 싸움에서 이범석등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하고 25년 김혁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총사령관이 되었으며 30년 한족 총연합회를 조직, 주석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에 힘쓰던중 공산청년당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호는 백야이며 장군의 생가지에는 24평 규모의 생가1동과 관리사1동, 부속사3동이 있고 전시관 유품 전시관이 있다.




청산리전투기념사진 - 맨앞이 김좌진

그는 1889년 11월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여 항일무장투쟁에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27세 되던 해인 1916년 풍기에서 결성된 광복단에 참가 하면서부터 였다. 그리고, 김좌진 장군이 '복로군정서'의 사령관이 된 것은 서일으 정의단에 참여, 임전 태세의 군정부로 개편된 조직이 북로군정서로 재편될 때이며 그해는 1919년 8월이다.

청산리 전투가 일어났던 시기(1920년)의 일본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하여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와 중국 동산성 일대에서 많은 무장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르 토벌하기 위해 그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장 독립군 부대들은 새로운 기지를 찾기 시작했고 김좌진 장군또한 새로운 기지를 찾기위해 이동을 시작했고 최종목적지로 백두산에 자리잡은 안도현의 접경인 삼로구 방면의 험준한 밀림지역으로 정하였다. 그 이유는 그곳이 무장 독립투쟁의 최대 목표인 국재진입 작전 수행에 원활하고, 험준한 지세로 좋은 요세지가 많으며 교통의 요충지로의 진격과 퇴각이 용이한 지리적 요충지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청산리 전투는 넓게보면 1920년 10.21~26일까지 백두산 인근 청산리 일대에서 홍범도와 김좌진 장군의 연합지휘한 10여회의 대소 전투의 승전을 통털어서 말한다.

여기에서 홍범도가 청산리 전투에 참여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홍범도란 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이란 입장에 의해서 홍범도가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이 넓은 의미의 청산리 전투의 시발점이 된 것은 바로 김좌진 장군이 이끈 '북로군정서군'이 일본군 '아즈마지대'와 싸워 이긴 전투라 하겠다. 당시 '북로군정서군'의 무장전력은 약 600명의 정예병력, 1백명 가량의 보충대 병력과 무기는 기관총 4정, 신식군총 500자루, 수류탄 1000개, 우마차 20대 정도분의 탄환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만주지역의 항일무장 독립군을 초토화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급파된 '아즈마지대'는 백두산에 주둔하고 있는 독립군을 초토화 시킬작전을 10월 17일부터 개시 하였으며 병력은 중무기를 갖춘 정예부대와 포병을 포함하여 5천명 내외의 병력으로 10월 20일까지 초멸시키겠다는 계획을 구상했다.

20일 아즈마군대가 청산리 골짜기로 침입하여 오기 시작하자 지금까지 더 이상 피전책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김좌진 장군이 전투를 감행하게 되었고, 그 장소로 일본군을 일거에 격퇴시킬 수 있는 백운평일대 고지로 정하였다. 전투가 벌어진지 약 30분만에 약 200명의 전위부대와 사상자를 냈다. 이것이 청산리 전투의 시발점이다.

이후 5일간의 결전으로 항일무장 독립군부대는 약 10여회의 전투를 하면서 일본군 1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항일 무장투쟁의 백미라고 하는 청산리 전투를 완결시켰다.

이것은 김좌진 장군의 치밀한 전략과 전술의 결과이며 항일 무장투쟁의 큰 흐름을 잡아 주었으며, '우리도 일제의 무장군을 깨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그후 김장군은 1930년 북만주 산시지역에서 공산주의자인 박상일에 의해 암살되었고 그의 사망후 항일무장투쟁의 흐름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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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충설명입니다. 조선일보를 보십시요. - 독설가 ┼
│ 조선일보를 보면 귀와 눈이 멉니다.


│ 그  마지막 문구는 제 주장의 결론을 함축적으로 제시함과 동시에 어떤 여운을 남기고 싶은
│ 의도였습니다.
│ 여기 오신 분들이나 조아세 분들도 조선일보를 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 그래야 토론이 진행되기때문이죠.
│ 그렇다면 조선일보를 보지 말자는 그 현실적인 의미는 무었일까요?

│ 모두다 아실테니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에 대한 답변을 해보겠습니다.

│  누군가 말씀하셨지만 정치면은 안보고 기타 다른 유용한 면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 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 제 바람은 정치면을 보시라는 것입니다.
│ 그 속에서 논거의 타당성, 전제, 숨은 의도등 비판적으로 한번 보십시요.

│  조금만 역사와 세계사를 안다면 천인공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문제는 기성세대들중 다수가 비판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에 있습니다.
│ 그것은 주입식 교육에서 기인한것이지요.
│  지금 교육은 그래서 더욱더 비판능력에 초점을 두어서 가르칩니다.
│ 국가 경쟁력이나 창의력에 굉장히 중요한 요건이거든요. 그래서 일종의 계몽운동이
│ 아직도 필요하구요, 그로 인해 우리 사회나 세대의 분열을 막을 수 있습니다.

│ 중요한것은 조선일보의 사설, 기사의 토씨 하나하나 모두 악의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 말이란것은 아다르고 어다른것인데 이를 교묘히 이용하여 본 내용과는 다른 새로운
│ 기사를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  뿐만 아닙니다. 심지어 활자면 배치까지도 이용하여 혼란을 부추키기도 합니다.
│ 정말입니다. 어제 2면 머릿기사 활자 배치 보셨습니까?
│ "가자, 북으로.."라고 크게 해놓았습니다.
│ 물론 이라크전 얘기인데, 이라크전이 반드시 남에서 북으로만 진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 그리고 한문으로 북으로 써놓았기 때문에 언뜻 보면 북한의 이미지를 연상케 합니다.
│  그리고 좌측 하단부에 실제 북한의 "북"자를 검은 글자로 아주 보기 좋게 배치하였더군요.

│ 북한을 자극하겠다는 것입니까? 지금 이상황에?
│ 만약 조선일보에 제가 이런얘기를 하면서 항의한다면 절보고 과대 망상증에 걸렸다고
│ 할것입니다.
│   정말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까요?
│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포위해가면서 작전을 수행중인데
│ 왜"가자. 바그다드로"라는 제목을 못씁니까?
│ 그리고 우리가 미군입니까? 전쟁의 실상과 참상을 보도해야지 왜 진군하는 제목을
│ 붙입니까?
│  일제시대때에 하던 버릇 아직도 못 버린것 아닙니까?

│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 심각성을 깨닫고 조선일보를 보십시요. 그리고 생각하십시요.
│ 주어진 기사나 사설을 그대로 수용하지 말고 그 숨은 의미들이나 의도를 한번 보십시요.
│ 세상에 이럴수가....할 것입니다.

│  모르고 그러는 것은 뭐라 할 수 없습니다.
│ 그러나 조선일보 사람들...배울만큼 배우고 알건 다 알면서 그러는 사람들.....
│ 정말로 정말로 저주합니다. 인간도 아닙니다. 김정일보다 백배 천배 나쁩니다.
│ 알면서 그런짓 하는 사람들이 제일 용서받지 못할 짐승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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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3.152.185 이경섭: 숙자 번자의 36대손입니다.이름 팔지 마십시요  [03/27-12:08]
61.73.152.185 이경섭: 숙자 번자의 36대손입니다.이름 팔지 마십시요  [03/27-12:14]
211.111.58.127 독설가: 조선일보 나쁘다는 것 하고 공산당하고 무슨 상관이냐 이빙신아  [03/27-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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