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920 : 어제 대선 TV 토론회를 보고(펌)

♧ 이름:유권자
♧ 2002/1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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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대선 TV 토론회를 보고(펌)

[토론방베스트] 토론이란 무엇인가? - 첫 합동토론회를 보고

진정한 토론은 주고 받는 영수증과 같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합동토론회가 드디어 열렸다. 어찌 하다보니 이곳에 올린 글들이 전부 토론회에 대한 내용이어서 마치 이번 토론회에 대해서도 한마디 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쓸데없는 고민을 잠깐 했었다.

어찌되었건 난 토론회를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좀 더 발전하기 위해서 토론회도 자주 봐야 하고 스스로도 토론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미래를 결정할 수도 있는 대선후보간의 토론회라면 두말할 나위 없는 선택이 아니겠나 이 말이다.

이번 합동토론회에서 보다 주목한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상호토론(Interactive라는 말이 좀 더 명확한 의미를 줄 수 있다고 보여진다)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논리성을 떠나서 얼마나 당당히 토론에 임했는가이다. 셋째는, 정치·외교·통일안보라고 하는 주제의 성격에 맞는 논지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세 후보의 토론결과를 살펴보도록 하자.

상호토론(Interactive)의 관점

토론은 강의도 아니고 자기주장도 아니다. 반드시 상대가 하나 이상이 있는 상태에서 일반적인 대화수준을 넘어 논점을 유지하면서 논리적으로 토론상대와의 교감을 이루고 그 결과로서 토론을 지켜보는 사람을 대상으로 공감을 이끌어 내는 과정이다. 준비된 자료나 기존의 정리된 생각만으로 제대로 된 토론을 이끌어 내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고 그 어떤 자질보다도 순발력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토론이 가지고 있는 인터랙티브성에 있는 것이다. 이제 오늘 있었던 합동토론회장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세 후보가 질문을 하든 답변을 하든 필자가 우선적으로 본 것은 Eye Contact(시선접촉, 혹은 눈맞추기)이다. 적어도 토론에 진지하고 성실하게 임할 의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토론을 함께 만들어 갈 대상이 여러 사람인 경우에는 논지에 근접한 사람과 이것을 시도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말하는 Eye Contact이란 상대방을 향해 단순히 눈길을 돌리는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어떤 의도를 담고 있는지 정확히 읽어내려는 종합적 의지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또한 답변시에도 자신이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거기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전달하겠다는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카메라워크상 일일이 후보들의 이러한 Eye Contact 수준을 세밀하게 관찰하기는 어려웠으나 그들의 질문과 답변내용, 원거리로 모든 후보가 잡혔을 때의 모습 등을 감안할 때 이런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이회창 후보는 질문하는 상대가 누구든 간에 그들이 어떤 대답을 하는가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자신의 질문으로 이미 충분히 배부른 듯한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건 토론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자세가 아니다. 답변에서도 구체적인 해법이나 대안을 물었음에도 같은 얘기의 반복이나 원론적 수준에 그치는 게 많았는데 이는 토론상대방은 물론 논지를 쫓아가며 관전하고 있는 토론관전자를 맥빠지게 하는 일이다. 그만큼 이회창 후보의 토론에는 창조성과 집중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권영길 후보를 보자. 그는 여러 차례 구체적인 대안을 가지고 정책대결을 펴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주장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나머지 두 후보의 질문이나 답변내용과 관련이 없는 경우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정책대안을 줄기차게 얘기했고 이에 동의할 것을 당차게 제안했다. 게다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창조적인 표현으로 여러 가지 의미의 웃음과 반응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러한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인터랙티브성의 관점에서 보면 권후보에게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는 것은 그가 보여준 연설투의 일방성 때문이다. 권후보는 상대방과 호흡하는 토론을 보여주지 못했다. 왜 정책과 제도만이 화두가 되어야 하는가? 또 다른 토론 상대자들이 정책과 제도 이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에 대해 자주 논의하고 있다면 어느 정도는 거기에 동참해 주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니냐 이 말이다.

노무현 후보의 Eye Contact은 기본기가 잘되어 있다. 그는 토론상대방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 미리 예단하기보다는 상대방이 그 자리에서 말하는 내용과 의도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핵심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잘 짚어낸다거나 완벽한 대답이 될 경우가 많다는 점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 위해서 진지하게 노력하는 자세를 보인다는 것이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을 들자면 노후보 역시 질문하는 과정에서는 답변할 때보다는 이런 집중력이나 의지가 상대적으로 약해진다는 점이다.

당당하고 떳떳한 정치인이 아름답다

당당함의 관점

토론에 자신 있어 한다는 질문에 노후보가 이런 대답을 한 점이 있다. 내가 토론에 자신 있게 나설 수 있는 것은 토론능력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걸어온 길이 당당하기 때문이다. 만약 토론이라고 하는 것이 논리력이나 표현력만으로 우열을 가리는 것이라면 지금과 같은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을 것이다. 토론관전자가 평가하는 또 하나의 척도는 그러한 논리나 표현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실천력으로서의 당당함이 있느냐 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후보와 권영길 후보의 발언자세를 보라. 두 후보의 표정이나 목소리에는 당당함과 자신감이 배어 있다. 이회창 후보의 표정이나 목소리에 나머지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당당함과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던가? 그가 질문이나 답변을 마칠 무렵의 행동을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이회창 후보가 고개를 숙이거나 돌리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을 것이다. 가끔씩 자신의 발언시간을 충분히 쓰지 않고 말을 끝맺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마도 자신이 없거나 좀 더 이야기하는 것이 도움이 안될 경우였을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이회창 후보가 그동안 합동토론회를 기피해 온 이유가 토론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당당함의 부족이었음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경제분야는 또 다르다.^^)

주제성격에 맞는 논지유지의 관점

오늘 첫 합동토론회의 주제는 정치·외교·통일안보 분야였다. 권후보는 시종일관 정책이나 제도 중심의 대안들을 중심으로 논지를 이어가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정책중심의 검증이라는 명제 하에서는 권후보의 논지가 옳다.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 권후보와 나머지 두 후보의 정책은 누가 봐도 비교가 된다. 그러나 이번 합동 토론회에서 국민들이 양강이라 부르며 주목하고 있는 두 후보간에는 정책의 내용이나 타당성만으로 비교우위를 논하기 쉽지 않은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여기서 새로운 비교잣대의 필요성이 생긴다. 누가 더 새로운 사고방식과 실천의지를 가지고 있느냐를 과거의 이력과 현안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판단을 통해 확인해 봐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별점을 합동토론회에서조차 확인할 수 없다면 토론관전자는 흥미를 잃게 되지 않을까? 권후보가 적어도 5 : 5 정도의 비중으로 정책제안과 더불어 이러한 비교검증에 동참했다면 더 좋은 점수를 받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필자 나름대로의 평가를 해보았지만 오늘 토론의 승자를 삼자 구도에서 꼽자면 권영길 후보의 손을 들어주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보다 많은 국민들이 주목한 양강구도의 관점에서 보면 노무현 후보가 안정적인 구도를 유지하면서도 그만의 색깔을 적절히 보여주는데 성공한 토론회였다는 생각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두 번째 합동토론회의 주제인 경제분야에서야말로 이회창 후보의 밑천이 다 드러나고 권후보도 오늘 따놓은 점수를 잃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본다. 확실한 것은 이회창 후보가 토론회를 통해서 점수를 잃으면 잃었지 조금이라도 더 얻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전망이다.